본문 : 시편 112편 1-5절 제목 :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받는 복 찬송: 208장
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3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4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5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계절의 여왕이라 부르는 5월을 이제 하루 남겨두었습니다. 아름다움보다는 재난과 어려움을 남기고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고 감사한 것은 어려움 속에서도 이겨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팬더믹 상황에서 앞으로를 생각하면 더 어렵게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소망이 있음은 오늘까지 지키신 하나님이 내일도 함께 하시며, 은혜를 준비하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에게 은혜가 함께 할까요? 오늘 시인은 우리에게 복의 조건과 복의 열매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시인의 복이 함께 하고 우리 또한 이 복의 반열에 서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먼저 복의 조건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율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경외할 수 없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할 수 있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변화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변화된 심령은 율법을 의무가 아니라 사랑으로 행하게 하게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의미는 두려워서 떠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사랑이 너무나 감사하여 그 사랑 앞에 떨리고 마음이 경외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작은 마음으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임하였습니다. 우리가 이제 그 사랑앞에 서기를 원합니다. 어느 상황에서도 이 사랑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두려움이 이 사랑앞에 서게 한다면 이 두려움마저도 붙들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늘 아픔은 두려움이 아니라 소홀함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받은 자의 복의 조건은 사랑앞에서 경외하며 주의 말씀을 행하는 일입니다. 이 행함앞에서 하나님은 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그 복은 후손들이 잘되는 복입니다. 부모의 신앙만으로 자녀들이 잘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후손들도 신앙안에서 거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복이 계속해서 흐르는 것을 말씀합니다. 솔로몬은 흐르는 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 이임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우리가 믿고 더욱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우리가 힘을 써야 합니다. 이 재난의 때에 더욱 신앙교육을 강화해야 합니다. 앞으로 더한 어려움속에서 걸어야할 자녀들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서기 위하여 우리가 사력을 다해야 합니다. 필요한 신앙훈련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옵션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 때가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의 때일 수 있습니다. 함께 행하지 못했던 가정예배를 드리며, 성경을 암송하며,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며, 남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안에 있음이 복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말씀을 행하는 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은 이웃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며 꾸어주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주시는 복이 따로 있습니다. 이 복은 마르지 않는 복입니다. 언제나 흐르는 복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남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흐르도록 복의 통로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일을 행할 때에 하나님은 5절에 잘 된다고 말씀합니다. 9절에는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중에 들려진다고 말씀합니다. 왜 이일이 복이 됩니까? 신앙의 열매는 결국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이 일은 모든 삶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도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진리가 되어 하나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 내일 거룩한 주일을 준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나눔 : 1) 삶에서 언제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십니까? 2)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를 결단하는 하루가 되십시다. 기도 : 1) 평생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게 하소서. 2) 자녀들이 평생에 예수안에 거하게 하시며 신앙이 견고하게 서게 하소서 3) 재난에 때에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시며 사랑하는 교우들에게 힘을 더하여 주셔서 모든 일에서 오직 믿음으로 다가서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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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삼하22장 27-31절 제목 : 하나님은 나의 전부이십니다. 찬송 : 20장
27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28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29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 30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31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진실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허락하신 새날이 우리에게는 살아야할 이유이며 소망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주관자가 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심은 이유가 있음이며 이유는 사명이 되며, 사명이 있는 한 하나님의 은혜는 지속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빛을 발하며 특별히 부활의 주님을 믿는 믿음은 어둠속에서도 반드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케 하기에 오늘도 오직 믿음으로 서는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다윗은 왕이 된후에 오늘 본문의 말씀을 고백합니다. 자신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고백하는 찬양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무엘하 22장 전체를 읽고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기도했으면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러한 믿음 되게 하시며 하나님을 더 많이 깊게 알아가는 신앙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백이 있기를 원합니다. 먼저 이러한 믿음의 고백이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려움속에서도 기도하는 법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다윗은 말할 수 없는 힘든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어려운 순간마다 그가 한 행동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보이지 않고 해결하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며 쉬이 포기할 수 있을 법도 한데 다윗은 언제,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쉬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기도가 호흡이 되고 있습니까? 자신의 기도를 넘어서서 형제와 자매를 위하여 더욱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기도대상자의 삶과 영혼에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영으로 깨닫게 되며 성령으로 경험케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자신과 형제와 자매를 위하여 그리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결국 기도는 광야 같은 길에 유일한 탈출구입니다. 다음으로는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한 후에 하나님을 알아가지만 기도하기전에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의지할 수 있는 단초를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때로는 한 마디의 말씀을 통하여, 때로는 한사람의 사랑을 통해서, 때로는 형제와 자매의 교제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믿음의 단초를 보여주십니다. 너무나도 순간이고 작은 부분이지만 그것을 믿음으로 붙잡을 때에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이 됩니다. 우리는 거룩한 것을 너무나 쉽게 세상적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세속적인 모습으로 대하고 있지는 않는 지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모든 것들이 거룩함을 알고 이 모든 것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세상을 통치하고 계심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간섭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아갈 때에 그 작은 단초는 결국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간증이 됨을 믿습니다. 모든 것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십시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행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복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하나님의 말씀앞에서 깨끗하고 겸손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영적으로 경험하는 길은 타락한 길이 아니며 교만한 길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교통하는 길은 순종하며 따라가는 길입니다. 함께 하는 길은 완전합니다. 진실합니다. 그리고 그 길위에 서는 모든 이들에게는 방패가 되어주십니다. 우리는 이 길을 걸을 때에 하나님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반드시 완전하고 진실하고 방패가 되심을 믿음으로 동행하십니까?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심을 믿고 나아가십니까?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아갈때에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먼저 믿는 믿음이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앎이 추상적이지 않기를 원합니다. 기도함으로, 선재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동행하는 믿음으로 설때에 하나님을 더욱 깊게 경험하게 되며 성벽을 뛰어넘는 은총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승리의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나눔 : 1) 나에게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 5가지 단어를 사용하여 고백해 봅시다.) 2) 하나님의 도가 완전하다는 사실을 언제 경험하십니까? 기도 : 1) 재난의 때가 끝날 때에 하나님을 더욱 깊게 사랑하게 하소서. 2)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온 땅에 충만히 임하소서. 3) 영적, 경제적, 신분, 육체적으로 곤고하는 교우들에게 힘을 더하소서. 본문 : 갈5장 4-6절 제목 :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찬송 : 450장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는 믿음뿐이니라 아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면 웃음은 행복의 열쇠라고 합니다. 믿는 자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면 오늘 우리에게 영광의 열쇠는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모두가 알고 있듯이 열쇠는 바로 사랑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열매이고 그 열매가 또 다른 사랑의 씨앗이기에 사랑은 처음과 끝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사랑의 열매가 맺히기를 원합니다. 사랑이 전부가 되게 하소서 오늘 본문은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신앙을 율법이라고 여기는 이들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율법을 통한 구원이라는 이단적 가르침이 침투하였습니다. 구원은 믿음이 아니라 율법의 행함이라고 가르칩니다. 사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참으로 쉽습니다. 이 가르침은 사람을 속박하고 두렵게 하며 결국 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기에 사단의 역사는 더욱 강력합니다. 율법의 특징은 언제나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 기준이 됩니다. 평가와 판단과 정죄가 있습니다. 힘들기에 마스크를 써야만 합니다. 자신이 이 비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남을 먼저 비난해야 하기에 편당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중심은 언제나 자신입니다. 이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과 반대되는 은혜입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면 모든 것이 힘들고 짜증나고 어렵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알면 쉬워집니다. 왜냐하면 결과를 온전히 맡기고 과정을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과정중에 연약한 우리를 사랑으로 동행하시는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기에 언제나 감사이고 감격입니다. 은혜안에서 행함은 억압이나 억지가 아니고 자유이며 은혜에 대한 자유로운 반응입니다. 신앙생활이 재미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즐겁습니다. 왜냐하면 이 고난의 과정가운데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고 율법으로 신앙의 기준을 삼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도 끊어진 자라 합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신앙입니다. 은혜를 아는 신앙의 열매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입니다. 어떤 상황 형편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시작과 내용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5절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의의 소망을 기다립니다. 은혜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은혜는 믿음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그 믿음은 성령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소망의 믿음을 어떻게 주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일어나는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율법을 회개하고 생명을 구하는 자는 이 지점에서 자신을 위하여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봅니다. 십자가 사랑이 미래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자신의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날마다 강권합니다. 이 사랑이 우리 삶의 시작과 마지막이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이 율법이 아닌 은혜안에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되기를 원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구원받은 증거는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사랑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사랑은 결국 우리를 진실하게 합니다. 사랑은 우리로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대하여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서기를 원합니다, 뒤로 물러서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서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붙잡고 있는 가 하는 것입니다. 재난의 때에 우리의 답은 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선이십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인정할 때에 세상의 문은 열립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은혜가 열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서기를 축원합니다. 나눔 : 1) 늘 우리 자신에게 존재하는 율법적인 요소와 마음과 행동은 무엇인가? 2) 주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를 경험한 것을 오늘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기도 : 1) 주여, 주님과 떨어지지 않게 하시며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2)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말과 행동과 삶이 되게 하소서. 3) 재난의 때에 힘들고 지친 모든 교우들에게 은혜를 베푸사 지금도 사랑으로 역사하는 주님의 능력을 부으사 믿음으로 서게 하소서. 본문 : 마가15장 16-20절 제목 : 주님은 진짜를 원하십니다. 찬송 : 278장
16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17 예수에게 자색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18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하고 19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20 희롱을 다 한 후 자색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아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도 말씀앞에서 나의 나됨을 바라보며 하나님앞에 감사를 올려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실이며 우리는 언제나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이 가짜가 때로 부끄러워 늘 마스크를 쓰고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의 시작은 연극에서 사용된 마스크입니다. 이것을 페르소나라고 합니다. 자신을 감추고 잠재된 자신을 내보이기를 원할 때에 사용이 된 것입니다. 건강을 위하여 쓰는 마스크를 바라보며 그 마스크가 혹 오늘도 우리의 마음에도 있지 않는 가 돌아보게 됩니다. 지난 세월 우리는 얼마나 많이 마스크를 쓰고 살아왔던가요? 아니 오늘도 우리는 나를 감추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사용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오늘은 마스크를 던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얼굴이 되기를 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많고 허물로 죽어서 언제나 살아있는 듯 보이려고 마스크를 쓴 우리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친히 고통을 당하셨고 희롱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자색옷을 입으심이 우리의 왕이 되시기 위함임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시관을 쓰심이 우리의 영원한 왕이시되 치유와 회복의 왕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갈대를 드심은 참된 왕의 징표임을 믿어야 합니다. 침뱉으심을 당함은 우리를 대신함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박고 생명으로 다시 살아남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믿지만 그들은 이 진실을 하나도 믿지 못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자신들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도 혹시 내 자신을 볼 수 없음이 아직도 내가 왕이라고 하는 허상의 마스크를 쓰고 세상앞에 서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상처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하며 벗겨내는 우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나는 주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요? 참으로 힘든 질문이지만 물어야 합니다. 오늘 로마의 병정들처럼 나는 마스크를 쓴 채로 주님을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능력이 없으신 분, 멀리 떨어져 계신 분, 나하고는 상관이 없으신 분,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분으로 여겨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을 그렇게 취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왕이 되어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친한 척하지만 언제나 배신의 자리에 서 있는 우리들은 아닙니까? 마스트를 벗고 이 아침 주님을 봅니다. 왜 주님은 이러한 고난의 자리에 계십니까? 왜 우리는 이 아침 이 본문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까? 왜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이러한 고난을 허락하셨는가? 왜 이 고난이 나 때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가? 이제는 마스크를 쓰고 있음이 답답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마스크를 미움의 마스크를 두려움의 마스크를 쓰고 있음이 괴롭게 때문입니다. 이제는 압니다. 세상을 살면서 나의 마스크를 벗기시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세상 가운데서 나를 사랑해주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스크를 벗고도 행복하게 만남을 이룰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만남과 달리 주님과의 만남은 언제나 나에게는 소망이며 위로이며 격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나는 주님앞에서 마스크를 벗습니다. 나에게는 더 이상 마스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안에서 호흡함이 건강이며 편안함입니다. 이제 나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하시는 주님뿐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진실하게 주님을 뵙고 싶습니다. 우리안에서 말씀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고난과 고통이 나를 위함인 것을 한 가지 한 가지 보여 주십시오. 이 길만이 회복이요 새로운 살로 채워지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가 재난의 때를 지나고 있습니다. 언젠가 마스크를 벗는 그날이 내 마음의 마스크도 벗는 날이 되게 하여 주시사 주님 닮은 온전한 마음과 얼굴로 서게 하여 주소서. 나눔 : ) 나의 마음을 덮고 있는 마스크는 무엇인가요? 2) 언제 주님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고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나요? 기도 : 1) 주님, 죄의 마스크가 벗겨지게 하시어 온전한 모습으로 주를 뵙게 하소서 2) 재난의 때에 우리의 심령이 더욱 새로워져 주님을 닮아 가게 하소서 3) 여러모로 어렵고 힘든 교우들을 붙드시사 오늘도 승리하게 하소서 본문 : 삼하14장 1-3절 제목 : 하나님 앞에서 행합시다. 찬송 : 143장
1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 2 드고아에 사람을 보내 거기서 지헤로운 여인하나를 데려다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상주가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 같이 하고 3 왕께 들어가서 그에게 이러이러하게 말하라고 요압이 그의 입에 할 말을 넣어 주니라 아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도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비둘기처럼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만이 승리임을 고백하며 누리며 열매 맺는 하루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이 사람일수 있는 것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육신과 하나님의 호흡으로 만드신 것처럼 하나님의 호흡이 우리와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입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할 본문은 쉽지 않는 본문입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다말을 강간한 암논을 죽이고 3년동안을 큰 아버지의 집에서 보내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그를 향한 징계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인지라 자식을 보고픈 마음을 충신인 요압이 읽습니다. 그리고 한 여인을 준비시켜서 연극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준비한 말을 그녀에게 가르쳐 줍니다. 여인은 대본대로 행하고 압살롬은 성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2년동안 다윗은 그를 부르지 않습니다. 압살롬은 요압을 통하여 결국 5년만에 다윗을 만나게 되는 정황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관계가 온전하지 못함은 결국 자신들의 죄 때문입니다. 다말이 어려움을 당할때에 암논에 대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한 아비의 무책임의 잘못이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죽인 압살롬의 잘못 또한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속에서도 사람의 정은 그들을 서로 그리워하게 하고 결국 사람이 중재가 되어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만남이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남인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무엘하 15장에 압살롬은 반역을 꾀하게 됩니다. 반역은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반역이기에 분명 잘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만남 가운데 잊은 것이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들에게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다윗에게도 압살롬에게도 요압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잘못한 상황에서 회개가 없습니다. 회개가 없이 서로의 정에 이끌려 감이 결국 하나님앞에 반역을 하게 됩니다. 삶에서 인간의 정으로 행하는 것들에 사단은 결국 역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정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반석위에 설때에만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견딥니다. 그러나 사람의 정은 언제나 무너지고 파괴됩니다. 끝은 언제나 배반이며 배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에도 혹 인간의 정이 먼저이고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의 말이 중심이 되어 살아가는 부분은 없지 않는 가 돌아보게 됩니다. 주님은 참된 사랑을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의 공의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공의와 정의를 경험하지 못하면 신앙은 언제나 한쪽으로 치우치고 참된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기에 언제나 힘없는 신앙이 되고 맙니다. 우리안에 뜨거움이 언제 있었습니까? 우리가 회개하며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될 때입니다. 그들의 가족들이 참으로 회개하며 하나님앞에 엎드렸다면 그들의 가족의 삶은 어떻게 변하게 되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왕족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더라면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지 못하면 마음은 언제나 굳어버립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참된 가족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이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교회에서 서로에게 참된 영적인 가족이 될 수 있을까요? 요압처럼 사람의 말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혹 마음에 벽이 있어서 그 벽을 넘어서지 못하십니까? 더 어려운 문제가 다가오기 전에 우리 모두가 이 벽을 넘어서기를 원합니다. 벽앞에 설 때에 주님은 모든 막힌 담을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예비하신 은혜를 경험케 하십니다. 이 은혜가 오늘 우리의 삶에 흐르기를 축원합니다. 나눔 : 1) 사람의 정으로 말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때는 언제입니까? 2) 내가 회개해야할 문제가 삶 가운데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 : 1) 회개함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벽을 넘게 하소서. 2) 재난의 때를 지나가게 하시며 은혜를 주사 믿음으로 온전히 서게 하소서 3) 영적, 경제적, 신분, 육적으로 곤고한 교우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소서. 본문 : 갈3장1-3절 제목 : 성령으로 시작하고 마치겠습니다. 찬송 : 299장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아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한 주의 마지막 새벽이 밝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주일에 하나님앞에 서야 합니다. 늘 무너진 시간을 생각하며 흔들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흔들림이 있어 아버지앞에 올수 있기에 아픔이 시련이 고난이 은혜입니다. 흔들림속에서 우리가 길을 걷는 이유는 이 풍파속에서도 주님이 동행하여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 믿음으로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믿음보다 보이는 자신의 행위를 믿음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러기에 이 기준으로 자신이 속한 사회를 평가하기에 세상은 갈수록 빈부의 격차는 심화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더 많은 경쟁을 하고 결국 사람들은 계급이라는 제도안에서 평가받는 소모적인 존재로 취급되고 맙니다. 심지어 교회안에서도 이러한 아픔은 진행됩니다. 가장 큰 아픔은 교회안에서도 믿음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지방의 교회도 이러하였습니다. 잘못된 이들로 인하여 복음의 근거가 믿음이 아니라 율법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으로 그리고 이방인으로 예수를 믿는 이들이 율법이 구원의 근거로 가르칩니다. 이에 주님은 바울을 통하여 복음의 근거가 믿음임을 말씀합니다.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 근거가 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눈앞에 보인다고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근거가 된다면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합니다. 혹 오늘 우리의 삶에도 어리석은 부분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내 자신의 삶을 판단할 때에 율법입니까? 아니면 은혜입니까? 가정과 교회를 생각할 때에도 율법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은혜가 먼저입니까? 문제앞에서 우리의 시선이 밖으로 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안으로 향하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벗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 은혜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려고 하십니까? 이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오직 주의 은혜인데 은혜를 은혜되게 하심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인가 은혜인가 묻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의 결과입니다. 나의 힘과 능력으로 성령하나님이 나의 시종을 드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고아와 같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보혜사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을 적용한다면 세상의 고된 삶을 지날때에 자신의 의가 힘이 되는 가? 아니면 성령의 능력이 힘이 되는 가를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고 함은 성령의 도우심이 있을 때입니다. 돌아보면 정말 그러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목회를 하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재난의 때에 더욱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일에 증인으로 아브라함을 소환합니다.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은 것이 율법으로인가 아니면 믿음으로 인함인가를 묻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찾으셨습니다. 행할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 은혜위에서 믿음이 자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깊이 해야할 것은 그 은혜를 세어보는 것입니다. 정말 돌아보니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한가지 더 대답해야 합니다. 어제가 은혜였다면 오늘과 내일은 은혜입니까? 아니면 율법입니까? 은혜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이들이 순간 순간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려고 합니다. 사단의 역사는 우리의 영적인 삶 즉 기도중에도, 섬김과 봉사중에도, 십자가를 지는 일에도 성령이 아닌 은혜가 아닌 육체로 율법으로 인도해 가려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 우선입니다. 믿음을 주시기 전에 우리에게 은혜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내가 주님을 찾기전에 주님이 우리를 찾아주셨습니다. 이 사랑이 재난의 때에 더욱 깊이 새겨지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일을 육체로 끌고 가는 사단의 역사에 항거하며 성령으로 무릎으로 은혜로 서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날에 믿음이 있는 자를 보겠느냐 하십니다. 나눔 : 1) 늘 육체로 마치려고 하는 습관이 있지는 않는 가요? 2)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기도 : 1) 은혜로 시작하여 배신으로 마무리하는 삶이 되지 않게 하소서. 2) 거룩한 주일을 준비하게 하시며 하루속히 회복되게 하소서 3) 영적, 신분적, 경제적, 육신적으로 곤고한 이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소서. 본문 : 마가 14장 36-38절 제목 : 기도만이 강하게 합니다. 찬송 : 157장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꺠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도뢰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아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새롭게 시작되는 이 아침 사랑하는 주님을 찬송합니다. 재난의 때에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없다면 절망이고 좌절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함이 언제나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본문은 가장 절망적인 순간을 어떻게 가장 영광스러운 상황으로 바꾸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먼저 기도하심으로 역전을 이루어 냅니다. 십자가고난에 대한 갈등이 있습니다. 이 갈등이 너무나 귀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이셨음을 알게합니다. 예수님의 연약함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성육신하신 주님의 그 사랑과 우리의 고난을 대신 지신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됩니다. 사람들이 다 모른다 하여도 주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안에서 위로받습니다. 주님의 고난이 바로 나를 대신한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이 힘듦을 기도로 통하여 하나님의 뜻으로 바꾸십니다. 기도는 결국 하나님의 뜻앞에 무릎꿇게 합니다. 기도는 육신을 쳐서 말씀앞에 복종하게 합니다. 성령의 전적인 도우심으로 임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상황과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뿐입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길을 말하지만 우리가 걸어가야 하고 승리하는 길은 오직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뜻인 말씀뿐입니다. 오늘도 숨쉬는 순간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고난앞에서 드리는 주님의 기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기도하지 못하는 인생들을 향하여 주님은 기도의 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지 못하는 이들을 향하여 깨어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이 자신이 십자가를 짊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이 이 땅에 드러나는 것임을 알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하십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이 생명을 얻도록 우리가 십자가를 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복종으로 우리 모두에게 영생의 길이 열린 것처럼 우리의 기도로 말미암아 살아야할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될 줄을 믿습니다. 재난의 때에 더욱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기도의 너비가 넓어지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로 우리의 영을 강하게 하십니다. 시험앞에서 승리하는 길은 기도뿐입니다. 시험에 대한 답은 주님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연약하여 기도를 하지 못함은 자랑이 아닙니다. 다른 곳에 답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영으로 거듭난 인생은 영으로 육을 이겨내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기도는 성화의 과정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화의 과정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을 강하게 하는 과정은 언제나 복종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많은 설교를 듣는 다고 믿음의 성장이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듣는 말씀을 붙들고 기도함으로 우리는 영적으로 강하여 집니다. 육과 영을 분별하고 성령안에서 영의 충만으로 오늘도 강해지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민감하게 아버지의 뜻을 묻고 행동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을 역전시키는 길은 기도만이 바른 길입니다. 이 길위에서 아멘하며 걸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걷는 그 길에서 우리의 영은 더욱 깊어지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삶이 우리에게는 참된 행복이며 은혜이며 감사입니다. 오늘도 기도함으로 행복합시다. 나눔 : 1)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구별하고 계십니까? 2) 영이 육을 이길 때가 언제입니까? 기도 : 1) 언제나 기도를 통하여 영이 육을 이기게 하옵소서. 2) 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아멘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3) 주여, 속히 회복하게 도우시며 모든 이들을 강녕하게 도우소서. 본문 : 시편 110편 1-3절 제목 : 당신은 새벽이슬입니다. 찬송 : 449장
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 도다 아멘 오늘도 주안에서 승리하기를 원하며 인생의 진정한 승자는 보란 듯이 잘사는 사람이 아니고 성공해서 남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사람도 아니고 참된 승리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손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승리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그 문제속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 시편 110편의 말씀은 다윗의 예수님 예언의 시입니다. 다윗은 예수님 태어나기 1000년전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예수님의 예언을 말씀하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것을 경험케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하여 예수님이 드러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다른 방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며 그 말씀이 생명이 되어 역사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늘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는 생명의 말씀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언의 말씀의 주제는 무엇인가요? 먼저는 승리의 주님이심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원수들이 발밑에 거하게 되며 주님은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예언합니다. 정말 말씀대로 됩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사단의 역사는 궤멸되고 부활하신 주님은 권능의 상징인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승리의 주님이십니다. 십자가를 지심이 사단의 역사를 이기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안에서 십자가를 질때에 승리를 경험케 하십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을 넘어서서 어떤 상황속에서도 찬된 평안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이며 은혜입니다. 주님께서는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찾아와 주셔서 하신 말씀이 평안하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와 죽음은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승리의 문이 됨을 깨닫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걸으며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주의 오른손의 권능이 반드시 우리를 회복시키시며 온전케 하실 것을 믿기에 더욱 감사하며 이 길을 걷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는 주님은 통치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시온에서부터 통치의 권한을 주시고 원수들을 다스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며 여기에서 통치가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역사도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주님의 통치는 결국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임을 믿습니다. 순종은 말씀밑에 거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말씀대로 나아갈 때에 죽음에서 승리로 역전할 것을 믿습니다. 에스더가 왕앞에 나아간 것은 기록된 말씀안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약속대로 하나님의 말씀인 모르드게는 승리하고 말씀을 떠난 하만은 죽음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참된 왕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분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새벽이슬과 같이 나온다고 합니다. 주님의 날에 우리는 거룩한 옷을 입습니다. 이 옷이 십자가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능력입니다. 예수의 옷을 입은 이들은 새벽이슬과 같다 합니다. 하루가 지나고 저녁이 되면 모든 나무들이 죽은 듯합니다. 그러나 새벽이 되면 그 나뭇잎이 생명을 얻습니다. 새벽이슬 때문입니다. 승리의 주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은 모두가 새벽이슬과 같다고 하십니다. 죽은 곳에 생명을 주고 포기하고 좌절된 곳에 은혜를 부어주고 절망의 자리에 소망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유통하는 사람입니다. 받은 것을 전해주는 유통의 일을 감당함에도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퍼주는 우리이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왕이시며, 제사장이시며, 메시야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승리의 주님을 찬양하며 말씀으로 통치하시는 역사안에 순종하며 새벽이슬과 같이 생명을 유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나눔 : 1) 다윗처럼 내게 주시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은 무엇인가? 2) 새벽이슬이 되기 위하여 허락된 생명은 무엇인가? 기도 : 1) 승리의 주님, 통치의 주님, 생명의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2) 새벽이슬처럼 다른 이들을 이롭게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3) 재난의 때에 육적,영적,경제적,신분으로 어려운 교우들에게 힘을 주소서. 본문 : 삼하 5장 6-8절 제목 : 베레스 웃사의 교훈 찬송 : 425장
6 그들이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 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더라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이 아침 생명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살아있음이 선물이기에 오늘도 지극한 감사의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할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잊었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가지고 올때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성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 곳입니다. 그 성의 중심은 언약궤입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안에 언약궤가 존재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중심에 예수그리스도가 계심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성전입니다. 성전인 우리의 중심에 예수가 살아계십니까? 언약궤를 전쟁중에 빼앗기고 이제 찾아오는 과정에 웃사와 아효가 중심에 섭니다. 그런데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에 소들이 뜁니다. 그러자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드니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으로 진노하시고 결국 웃사가 죽는 상황입니다. 모든 것이 좋은 날이고 좋은 일인데 왜 진노가 일어난 것입니까? 먼저 질서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수레로 나르는 것이 아니라 출25장에 메야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과 인간사이의 직접적인 관계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인간을 위한 구원은 다른 방법이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행하시는 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웃사는 자신이 생각한 방법이 더 안전하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은 유일한 방법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우리의 삶에 나의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먼저일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서 바뀌는 믿음을 인정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은 언제나 상대적일 수 없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절대적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행하는 결단과 인내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는 움직이는 궤를 웃사가 잡았습니다. 인간의 힘이 작용되었습니다. 베레스라고 하는 말이 ‘치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궤를 컨트롤할 수 있다 생각하였습니다. 더 생각하면 웃사는 그 궤를 단순히 상징으로 받아들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생각으로 자신의 손으로 잡은 것입니다. 영적으로 의미를 두지 못하고 행할 때에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됩니다. ‘웃사’라는 말이 힘과 능력이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웃사를 치셨지만 원래의 뜻은 하나님이 인간의 힘을, 능력을 치셨다는 말입니다. 웃사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보다 더 높은 마음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언약궤보다 더 높은 위치를 바라고 무언중에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힘이 주님보다 앞서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생각이 주님보다 더 빨리 계산적으로 생각될 때가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치시는 진노앞에서 우리 모두가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어느 순간에도 인간의 인간됨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밑에 거하지 않으면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위에 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은 혹시 하나님을 아래로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염려하고 걱정하고 믿음없이 살아가는 모습은 아닙니까? 이해되지 않아도 아닌 것 같아도 하나님이 하시면 맞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야지 주관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말씀앞에서 내 자신의 죽어야하는 지점을 정확하게 찾아내어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이 온전히 하나님아래에 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이 주인되는 삶을 살다 저녁에는 수요말씀강해로 함께 만나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게 하기를 축원합니다. 나눔 : 1)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말씀위에 놓기 위하여 해야할 것이 무엇일까요? 2) 나의 힘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차이를 느끼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기도 : 1) 하나님이 치시는 삶이 아니라 건지시는 삶이 되게 하소서 2) 하나님 아래에 거하오니 재난의 때에 우리를 덮어 주옵소서 3) 영적, 경제적, 육신적으로 신분으로 고통당하는 교우들에게 은혜를 |